2010. 4. 2.

네팔 (룸비니)











룸비니는 불교의 시조 석가가 탄생한 곳으로 수많은 불교자들이 찾는 순례지이다
불교의 4대 성지에는 석가의 탄생지인 이곳 룸비니 성도지인보드가야 그리고
초륜법륜지인 녹야원 열반지인 쿠시나가라가 있다
2천 5백년 전 히말라야의 발치에 있던 많은 지역이 해체되어 갠지스강 강 평원에
기반을 둔 거대한 제국의 작은 공국으로 흡수되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카필라바스투
(Kapilavastu) 왕국을 통치하던 숫도다나(샤카족)와 이웃 나라인 데와다하(Dewadaha)
의 공주인 마야 데비(콜리야족)의 아들이었다. 마야 데비가 그녀의 친정인 데와다와를
방문할 때는 만삭의 몸이었다.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그녀 일행은 사라수 나무로 둘러싸인 연못이 있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룸비니를 지나가기로 했다. 그날 마야 데비가 룸비니에 도착한 기원전 563년
오월, 사라수 나무는 활짝 피어 있었다. 그래서 마야 데비는 경치를 감상하고 목욕도
하기 위해 길을 멈추었다.
목욕을 마치고 물에서 나올 때 그녀는 갑자기 산기를 느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길 게 늘어져 있는 보리수 나무를 잡았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 났다.
마야 데비는 카필라바스투로 되돌아 갔다. 싯다르타는 보호받으며 특권을 누리며
자랐다. 29세 때 궁궐 밖을 돌아다닐 때 그는 늙은 사람, 아픈 사람, 시체, 그리고
은자를 만났다. 고통과 죽음을 목격한 싯다르타는 화려한 삶을 포기하고 카필라바스투.
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처음 5년 동안 싯다르타는 존재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행각에 나섰다. 대부분의
여정은 금욕의 고행자로서 였으며 그 모습은 오늘날 힌두 사두들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자기부정으로는 결코 아무런 해답을 얻을 수
없음을 발견했다.
마침내 보드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49일 간의 명상 끝에 그는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었다. 보드가야에서 바라나시 근처의 사르나트(녹야원)까지 여행한 끝에
붓다는 다섯 제자들에게 첫 설법을 배풀었다.

붓다는 46년 간 중도(middle way)를 가르쳤다. 그는 고통이란 존재의 본래적 속성이며
그 원인은 집착과 욕망과 미혹 때문인데 만일 이런 부정적인 힘이 고귀한 8가지 길
(팔정도)에 의해 제어되면 열반(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붓다의 카트만두 밸리 방문을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붓다의 설법 대부분은 북인도와 갠지스 평원에 걸쳐 이루어졌다.
붓다는 80세에 고락뿌르 근처, 룸비니 남동쪽 100km 지점에 있는 쿠시나가르에서
열반했다.
전 인도 대륙의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왕인
아쇼카 왕(b.c 273~236)은 기원전 245년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를 참배하고 훗날
아쇼카 석주로 유명한 돌기둥을 룸비니에도 하나 세웠다. 중국의 구법승 법현스님은
403년 황폐해진 카필라바스투(석가족의 왕국)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후 636년 룸비니에 온 당나라 현장스님은 1000 여개의 사원터와 번개에 맞아
파손된 석주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15세기 말 무갈제국의 침입으로 이 지역은 완전히
황폐해지고 말았다. 전 지역은 버려져 야생의 정글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룸비니가 다시 살아난 것은 고고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통치자
랄파 라나(Ralpa Khadga Shumsher Rana)에 의해서였다. 그의 후원으로 독일의
고고학자 휘러(Fuhrer)는 1896년 석주를 발굴했고 그것은 나중에 아쇼카 왕이
룸비니를 참배한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비옥하고 온화한 평야지대에 있는 룸비니는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변에 16개 나라의 사찰과 10여개의 세계 각국의 민간 불교단체가 들어서 있는
불교 최대의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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