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2.

인도 (갠지스)


















우리는 갠지스강을 보트를 타고 바라나시로 가기 위해 역이 있는 잔시로 가서 그기서
야간 침대 열차를 타고 알하바드 (Allahabad) 까지 9시간을 가야 했다
밤에 도착한 역에는 많은 사람이 붐비고 있었으나 역에는 승객 들이 앉을 만한 의자
하나 없었고 이렇다할 안내 표지나 안내 방송 하나 없었다 지친 승객들은 플랫폼
바닥에 주저 앉거나 들어 누워 있었는데 전쟁통에 피난민들의 모습 그것이었으나
인도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 일행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 보았다
열차는 침대 열차임에도 의자 형태로 되어 있다 평소에는 의자로 이용 하다가 취침
시에는 앉아 있는 의자를 펼치면 침대가 되는 구조였다
불편한 침대 덕분에 우리 둘은 한숨도 못자고 뜬 눈으로 꼬박 날 밤을 세웠다
이튿날 아침 침대칸에는 승무원이 다니면서 샌드위치와 짜이 한잔을 두고 갔다
계속해서 여행을 할려면 먹어야 겠기에 입에 갔다 대었으나 도무지 먹히질 않았다
알하바드 에 도착 우리는 준비된 차량으로 이동후 갠지스 강변에 정박된 보트에
올랐다
보트는 다떨어진 천으로 만든 돛과 흔들면 부러 질것 같은 돛대로 만들어 졌다
우리는 한 보트에 6명 씩 올랐다 뱃사공은 한배에 2명씩이었고 추가로 배 한척이
따라 왔는데 식사 때가 되면 그 배에서 식사를 준비해서 먹곤 하였다
이런 보트를 타고 갠지스 강을 1박 2일 에 걸쳐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해
졌으나 한편으로는 매우 재미 있고 흥미가 있을것 같았다
갠지스의 인도명은 강가(Ganga) 이며 이강가는 인도인에게는 어머니의 강이다
본류는 연장 3000㎞, 유역 총면적 173만㎢. 세계의 강 중에서 연장은 17위, 유역면적
11위이지만 오랜 문명과 인구밀집 등 문화적 의의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큰강이다
원류(源流)는 중부 히말라야의 강고트리빙하에서 발원하는 바기라티강인데,
강가를 천상(天上)에서 지상으로 인도했다는 신화(神話) 속의 바기라타왕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깊은 협곡(峽谷) 속에 힌두교의 성지와 수도원이 있으며 순례자가 많다. 갠지스는
히말라야산중을 약 200㎞ 흘러서 델리 북쪽의 하르드와르 부근에서 힌두스탄평원
(히말라야와 데칸고원 사이의 평야)으로 나온다. 하르드와르까지를 갠지스강 상류부라
하면, 중류부는 이곳에서 우타르 프라데시주의 평원을 남동쪽과 동쪽으로 흘러
비하르주의 바갈푸르에 이르는 약 2200㎞의 구간이다. 평균 나비 300㎞의 평원안을
데칸고원 쪽으로 치우쳐 흘러 알라하바드에서 델리·아그라 방면으로 나오는
야무나강과 합류하고, 바라나시·파트나를 지나는 사이에 북쪽에서 유하(流下)하는
고마티강 외의 여러 강들과 남쪽 데칸고원을 흐르는 손강을 합류시킨다.
BC 1500년 전후에 인더스강 상류로 침입한 인도·아리아인은 BC 1000년 무렵에는
갠지스·야무나의 두 강을 중심으로 하는 갠지스강 중류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베다(Veda)라는 종교문헌을 만들어 복잡한 제사체제(祭祀體制)를 갖추어 나갔고
선주민(先住民)을 그들의 사회체제 안에 흡수시켜 가는 과정에서 아리아인의 문화는
선주민들의 종교·생활습관 등과 융합하여 변화하였다. 후세 인도사회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베다의 사상·문화는 이 갠지스강 중류 지역의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성립한 것이다.
습윤하고 비옥한 이 지역에서는 농업생산이 증대하여 상업발달을 촉진하고 도시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베다문화의 변경(邊境)이었던 하류지역에서는 BC 6∼5세기에
자유로운 사상가들이 배출되어, 그 안에서 불교와 자이나교가 생겼다. 인도의 거의
대부분을 처음으로 통일한 마우리아왕조는 하류지역의 중심도시인 파탈리푸트라
(현재의 파트나)로 수도를 정하였으며, 인도 고전문화의 절정기를 이룩한 굽타왕조도
이곳을 수도로 하였다. 12세기 말에는 구르왕조가 갠지스강 유역을 점령하여 이곳에는
모슬렘(이슬람교도)에 의한 인도지배가 시작된다. 남인도의 문화사 또한 갠지스강
유역문화의 수용과 반발의 역사라고 할 수 있으며 인도의 역사·문화는 갠지스강
유역을 무대로 전개되었다.
인도에서는 예부터 물과 하천이 신앙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갠지스강은 여러 하천
중에서도 가장 신성시되었다. 갠지스강에 대한 신앙은 이 강이 원래 <천상계(天上界)
를 흐르고 있었던 성스러운 강>이라는 신화를 만들었다. 강의 언덕에는 무수한 성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하르드와르·바라나시·알라하바드가 가장 중시되고 있다.
성지에는 가트(ghat;목욕탕)가 설치되어 있으며 목욕으로 죄장(罪障)을 씻어
없애버릴 수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갠지스강에서의 목욕은 힌두교도들에게 지고의
기쁨인데 만약 갠지스강의 언덕 부근에서 죽고 화장되어 유골과 재가 갠지스강에
흘러간다면 그것은 진정 무상(無上)의 기쁨이었다. 인도뿐만 아니라 고대에서는
육로보다도 수로 쪽이 보다 안전하고 용이한 교통수단이었으며 통상로는 하천을 따라 .
발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BC 13세기 중기의 아소카왕은 북인도 각지의 불교성지에 10여m나 되는 이음새가 없는
높고 큰 석주(石柱)를 세웠는데 그것들은 모두 바라나시 남쪽에서 제작되었으며
갠지스강 및 그 지류를 이용한 뱃길로 운반되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투라와
사루나트의 불상도 또한 갠지스강을 이용하여 운반되었다. 하천이 문화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굽타시대의 중요한 유적들이 산중에서 북상하여 야무나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베트와강과 그 지류연안(支流沿岸)에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서부 히말라야산중의 강고트리강에서 발원하는 많은 지류를 모아 벵골만에
이르게 하는 갠지스강은 자연을 풍성하게 하고, 많은 사람을 키워 사람들은 갠지스강을
<어머니 강가>라 부르며 숭배하고 있다.
보트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전히 바람의 힘으로 가는 배이지만 다 떨어진 돛에
의지하는 보트의 속도는 말로 얘기 할수 없도록 천천히 움직인다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으면 돛을 접고 노를 저어 가는데 돛과 노를 바꾸는 타이밍과
그 행동은 기가 찰 정도로 민첩하였다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이 광경은 무척 신기 하였으나 보트가 강중앙에서 자리를 잡고
정상적인 항해를 할 무렵 함께한 일행들은 뜨거운 인도의 햇빛을 피해 한자리씩
차지하고는 휴식으로 들어 갔다
우리도 전날 열차 안에서 설친 잠 때문에 베낭을 베게 삼아 한숨 자기 시작 했다
눈을 붙인지 두시간 후쯤 같이 탄 체탄이 우리를 깨웠다
항해 중에 점심 시간을 알렸으나 아무 것도 없는 강 한가운데서 어떻게 점심 식사를
하나라고 궁금히 여겼는데 곧 의문이 풀렸다
강 가장자리로 배를 정박한 다음 배 석대를 밧줄로 묶어 같이온 식당 보트에서 만든
식사를 보트위에서 함께 먹는 것이었다
음식을 손으로 먹어야 겠기에 우선 우리는 주전자의 물로 손을 씻었다
음식은 알미늄 쟁반위에 밥 그리고 달 감자 양고기 양파및 당근으로 먹을만 했고
원래는 손으로 먹어야 하나 포크를 준비해 주었다
우리는 인도에 몇일 동안 적응 되었다고 손으로 먹기 시작했다
점심 식사후 바로 배를 묶은 줄을 풀고 계속해서 갠지스를 따라 흘러 내려 갔다
제법 시간이 흘러 지루 하기도 하고 뱃 사공 들이 지친것도 같아 노를 달라고 해서
노를 한번 저어 보기로 했다
학교 다닐때 부산 송도 앞 바다에서 노 젓는 것을 배운 터라 어렵지지 않았 지만 노가
크서 생각 만큼 쉽지는 않았다
한편으로 인도 뱃사공은 노를 저어 가면서 계속해서 봉지에 든 약을 먹었고 강물을
그대로 컵에 퍼서 먹는게 아닌가
우리가 만약 그대로 따라 했다면 벌써 병원에서 사망 했을지도 모를 상황 이었다
인간이 환경에 대한 적응력에 그저 탄복만 할 뿐이다
오후 늦은 시간 갠지스는 환상의 풍경을 우리들에게 제공해 주기 시작했다
인도의 물소 들이 갠지스강에서 유유하게 목욕을 즐기고 있는것과 빨래를 하러 나옴직한
여인들의 움직임과 석양과 함께 어우러진 갠지스는 많은 순례자와 수도자를 배출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인도인이 아끼는 어머니 같은 강임이 분명했다
해가 막 넘어 가고 우리는 강 기슭에 배를 대고 모래 사장 위에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해가 넘어 가자 마자 어두워 지는 탓에 저녁 식사는 깜깜한 어둠속에 랜턴을 켜고
먹는둥 마는둥 끝내고 다들 다른 행사 없이 피곤한지 곯아 떨어졌다
아침이 되자 해가 멀리서 떠 오르고 일행들은 일어나기 시작 했으며 아침 볼일을
보기 시작 하였으나 화장실이 있을 턱이 없었다 대부분 풀밭에 앉아 큰일을 본 다음
가지고 간 물로 뒷 처리를 했다
물로 뒷 처리를 할경우 다소 요령이 필요한데 왼손으로 물통을 잡아 꼬리뼈 근처에 대고
물을 조금씩 흘리고 오른손으로 거시기를 닦으면 된다
인도인들은 그렇게 한다음 바로 바지를 올리나 우리는 뒤가 좀 축축하고 찜찜한 기분에
휴지로 뒤를 닦아야 개운하다 물론 휴지가 없다면 별수 없다
집사람은 이런 방법에 경악을 하여 큰것을 참는듯 하다가 결국 변비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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